2022년 12월 1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왕으로 즉위하는 대관식은 왕이 되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으로서 서약을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1953년에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를 해서 70년간을 재위하시다 올해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내년 5월에 찰스 3세의 즉위식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왕의 탄생을 축하하며 축제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도 이러한 즉위식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즉위식을 하셨나요? 십자가입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을 보시면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는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에 거주하던 히브리 사람, 로마가 다스리고 있던 모든 지역 사람, 또 로마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라면 장사를 하며 오가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헬라어까지로도 다 기록해서 모든 사람에게 나사렛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구원자입니다. 구원자가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님의 왕의 즉위식을 준비하였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왕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즉위식이란 가장 영광스럽고 화려하며 위엄과 영광이 넘쳐야 하는데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관식을 하신 것일까요?
1. 인간의 왕 되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vv.17-18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관식을 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왕 되고자 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골고다는 히브리 단어이고 같은 말이 라틴어로는 갈보리입니다. 그 의미가 왜 해골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그 지형이 해골모양으로 생기고 거기에서 사형 집행이 계속 되며 해골이라는 이름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 밖에 있는 사형장에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18절에 보시면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일부러 예수님을 가운데 배치하여 예수님이 강도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강도가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뺏은 것이 아니라 살인 강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잔인한 이들과 함께 예수님을 매달리신 이 장면은 왕의 즉위식이 아니라 처참한 사형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예수님을 환영하며 찬양할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좌우 편에 서서 영광스러운 권력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간의 죄를 위해 왕권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악한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를 우리에게 거꾸로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은 창세기 3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죄의 근원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본질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왕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왕은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영국에서 70년이나 재위를 한 엘리자베스 여왕도 사실 마음대로 살지는 못 했습니다. 실제적인 정치와 군사 등의 일은 총리와 의원들이 일을 하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였죠.
하지만 고대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권력과 능력으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행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할 자리로 왕을 열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군주로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자는 니므롯입니다. 창세기 10장 8절과 9절을 보시면
창 10:8-9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은 동네의 우두머리 정도가 아니라 한 지역을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니므롯 이름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이 사람을 왜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부근 것일까요? 이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사냥하는 사냥꾼이었습니다. 왕이 되려면 경쟁자들을 다 죽이고 승리한 자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니므롯이 사람들을 죽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자마자 한 일이 창세기 11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이 모여있자 죄가 집단화되며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로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런데 전제군주 니므롯이 사람들을 모아 먼저 한 일이 다시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왕되고자 하는 본질 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사는 것. 그러나 인간 모두가 다 왕이 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아주 소수만 왕이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을 죽이고 짓밟을 용기가 없거나 상황이 되지 않기에 강력한 몇 사람 밑에 종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한 통치가 임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그 혼란을 기록한 책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에는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입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에는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기도 민망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7장 18장, 또 19-21장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입니다. 17, 18장에는 미가라는 부자가 어머니 돈을 훔칩니다. 어머니가 저주를 하자, 그 저주가 자신에게 미칠까봐 어머니한테 돈을 돌려줍니다. 어머니 역시 자기의 저주가 아들에게 임할까 봐 그 돈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며 그것으로 신상을 세우고는 떠돌던 한 제사장을 불러다 집안의 제사장을 만듭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기 욕망을 위해 관계도 파괴하고, 저주가 임할까봐 임의로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종교를 만듭니다. 단 지파는 이것을 지적하고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그 신을 탈취해서 이주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라지고 하나님마저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하는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19장부터는 더 비참한 일이 벌어집니다.
한 레위인이 도망친 첩을 찾아 돌아오는데, 그 첩이 한 마을에서 강간 당하고 죽임을 당합니다. 이 구별된 레위인은 첩을 토막내고 모든 지파에 보내며 보복에 동참해 달라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집단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말로입니다.
서로 자기 욕망을 추구하다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왕이 없는 세대여서 그렇다고 친다면, 인간 왕을 세우면 해결되나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왕으로 다스리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왕이 왕이 되려면 백성들이 그 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순종하겠다고 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고 다른 요구를 합니다. 사무엘상 8장 4절과 5절입니다.
삼상 8:4-5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인간 왕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 요구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사무엘상 8장 7절과 8절에 나와 있습니다.
삼상 8:7-8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즉,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의도, 혹 내가 왕이 될 수 없다면 왕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그 모든 의도는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 되어 열망하던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인생이 정말 행복할까요? 세상을 호령하며,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마음대로 살아간다 해도 영적인 공허와 혼돈은 여전합니다.
즉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거나 왕과 같은 존재를 추종하여 유익을 얻으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기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왕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이 죄성이기에, 예수님은 왕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을 향해 마가복음 10장 4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힘을 가지면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권세를 부려 다른 존재들을 이용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도구로 쓰는 순간에 파괴됩니다. 돈으로 직원들을 부속품처럼 여기고, 여자들을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권력으로 주위 사람을 짓밟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우리는 쉽게 정죄하지만,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구나 힘이 생기면 그 안의 우상숭배적 본질이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끌기에 우리도 어떤 모습을 나타낼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왕 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신 이유는, 왕이 되려는 욕구가 십자가의 매달리지 아니하면 인간은 영원히 참된 왕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가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됩니다.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나타나는 분노라는 감정입니다. 언제 화가 나나요? 내 맘대로 안됐을 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내 마음대로 다 이루며 사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자주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나고, 삐지고, 나쁜 말을 하고, 불편한 말과 감정과 태도를 보입니다. 그것을 성격이 나쁜 것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하나님 되기를 열망하는 죄성에 사로잡힌 본질이 분노를 통해 표출돼 나오는 것 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할수록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합니다. 행복과 만족을 등지고 자꾸 남과 비교합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서 만족이 없고, 관계가 깨어지고, 비교의식에 괴로워 하고 있다면 십자가로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매달려 죽으심으로 왕 되고자 하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에 감사하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관식을 하신 것일까요?
2. 성도에게 참된 왕노릇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vv,19-22
두 번째로 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대관식을 하신 것일까요? 성도에게 참된 왕 노릇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19절 말씀입니다.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왕이 무엇인가요? 구약의 유대인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모형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셨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나중에는 유대인의 왕이 아닌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로 오십니다. 지금은 왜 유대인의 왕으로 즉위하시나요? 지금 예수님이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이 분이 왕이시며 통치자시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백성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서도 이분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며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20절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모든 언어로 공포합니다.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이것을 보고 21절에서 대제사장들이 반발합니다.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선동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자 팻말만이라도 마음대로 하겠다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왜 비참하게 매달리셨나요?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참된 왕권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과 44절입니다.
막 10:43-44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의 권세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알겠지만 너희는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말씀입니다. 이 죄성에서 벗어난 자들은 세상의 원리와 반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커지려면 섬기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입니다. 이거서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하늘의 왕권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왕이 된다는 것은 가장 낮아진 자리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죄로 인한 욕망이 없다면 원래 이런 방식으로 왕적 통치를 행사하게 지어졌습니다. 물론 개인적 욕심이 없이 참 백성을 위한 성군이 간간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기만을 위해 남을 파괴했습니다. 이는 모두 인간의 영혼이 뻥 뚫린 탓입니다.
더 많은 힘으로 나를 만족시키려는 죄성은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을 왕으로 삼으십니다. 요한계시록 5장 10절입니다.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할 1호다.
참된 왕 노릇이 무엇인가요?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더 섬기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랑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왕 노릇을 통해 행해져야 됩니다. 사랑은 조건없이 상대의 영적 유익을 위해 섬겨 그 대상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욕구가 강력한 사람은 절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욕망이 줄어드는 만큼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인 이유는, 자기 욕망을 다 이 땅에 버리고 오직 온전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왕이 되어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왕 노릇을 하고 계십니까? 집에서 연습하시면서 천국을 먼저 경험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인간은 본질 자체가 욕망으로 충천한 존재이기에 노력으로는 되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때만 참된 왕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매일 만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