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은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14장에 처음 도마가 질문했습니다. 5절입니다.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대체 어디를 가십니까? 여쭈었더니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답해주셨습니다. 아주 명확한 답입니다.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모르는 자에게, ‘나의 말과 나의 삶을 따르면 그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 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8절에서 빌립도 질문합니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떠나시기 전 확실한 증거를 달라고 요청했더니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고, 내 삶과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라고 답해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은 질문과 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2절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질문합니다.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가룟은 지명으로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가 가룟인이었고, 다른 유다는 성경 다른 곳에서 ‘야곱의 아들’이라고도 불립니다. 우리한테는 충분히 알려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세상 사람들한테는 예수님을 보여주시지 않으십니까? 하고 여쭌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이 약간 모호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동문서답을 하셨거나 이 질문을 무시하셨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답이 제자들이 기대하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문맥을 따라 읽어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에 어떻게 드러내실지를 아주 명확하게 답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1. 성도의 사랑을 통해 드러나십니다. vv.22-24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성도의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23절 상반절입니다.
[23a]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
질문과 답만 보면 사실 동문서답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주세요’ 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킨다’고 하십니다. 무슨 말을 지킨다는 것인지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13-16장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제자들이 지켜야 될 예수님의 말씀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15장 12절을 보시면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이 많은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지만 요약해보면 한 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니 나를 믿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계명입니다. 구약처럼 수백 가지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어떻게 되나요? 13장 3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하지 않나요? 성경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욕망을 위한 이기적 반응에 불과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좋아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심지어 가장 숭고하다는 부모의 사랑도 많은 경우 조건적입니다. 이런 종류의 감정적 반응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이며 죄인이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예수님은 예수님 수준의 사랑을 요구하시나요? 이런 사랑은 죄에서 벗어난 자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조건적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우리 존재로부터 배제시켜버리고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근원을 말합니다. 인생에 하나님이 사라지니 인간은 공허해지고 그 공허를 채우고자 끊임없이 열망하며 모든 상대를 나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가 있는 채로 진짜 사랑을 할 수가 없고, 자기를 위한 사랑은 하면 할수록 지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세상에는 없는 하늘의 사랑을 보여주셔야 하는데 지금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이 땅에 남겨놓으시고 우리를 통해 그 사랑이 드러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12절입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지난번 설교에서 다루었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큰 일’이란 기적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적이 일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랑을 보일 때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그 사랑과 영광의 결과입니다. 과거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한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에 사로잡혀 선교사님들이 오셨습니다. 강퍅함, 미신, 가난, 배척, 불신으로 물들어 있던 조선에서, 땅의 풍토병 등으로 본인과 배우자, 자식 등 많은 분들이 묻혔습니다. 지금도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님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어떤 문구는 ‘나는 한국을 세상의 어떤 나라보다 사랑해서 이 땅에 묻히고 싶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무 보상도 바랄 수 없는 어두운 땅을 사랑한 헌신의 결과로 우리가 빛을 보게 되었고 예수를 만나게 된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보다 큰 일’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 사랑을 벗어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늘 나의 유익과 나의 미래를 생각하던 근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나타낼 수 있는 사랑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았던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23절 하반절에 나와있습니다.
[23b] …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혹은 성공의 보상이 아닙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가장 놀라운 보상은 아름답고 은혜로우며 사랑과 긍휼이 가득하신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인생의 진짜 불행은 우리가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한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를 온전히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우리의 뻥 뚫린 가슴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할 때에 오는 갈증과 목마름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할 때, 논문은 끝나지 않고, 몸은 아프고, 돈은 없고, 모든 것이 고통스러워서 매일 탈출하게 해 달라고 몇 시간씩 기도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새벽기도 후 큰 교회당에 혼자 남아 평소대로 푸념처럼 기도를 시작했는데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음성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졌습니다. 상황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제 마음이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이 복이군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걸어가야겠다.’하며 고백하고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돈도 많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돈은 쓰고 나면 없어져 버립니다. 반대로 고통하고 절망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는 순간들이 제 인생가운데 분명한 은혜의 언덕들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을 회복시켰던 순간은 어떤 것으로 차 있나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그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복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 사랑을 붙들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되나요? 24절입니다.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듯, 미운 사람 미워하고, 내 이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그게 안 되면 화내서라도 남을 조종하며 사는 것은 예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옛사람의 본성이 강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사는 태도의 결론은 더 큰 불행입니다.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다 깨지기 때문입니다.
짜증내고 화내면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살려는 사람 주변엔 사람이 남지 못합니다. 결국 외로워지고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고 내 뜻과 내 말대로 살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지는 않았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이 명령은 사실 아주 높은 명령입니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되나요? 마태복음 5장 44절을 보시면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노력한다고 행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내 뜻을 포기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 우리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했을 때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놀라운 복 뿐 아니라 우리 또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영광과 은혜를 맛 볼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심으로 놀라운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2. 성도의 평안을 통해 드러나십니다. vv.25-31
두 번째로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성도의 평안을 통해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 새벽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제자들에게 ‘나는 떠난다. 지금은 말로 하지만 이제 곧 내 말을 못 듣게 된다’고 유언처럼 말씀하십니다. 이어 26절에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사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분이 많이 있지만, 성령의 역할은 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식을 사는 것, 이사 날짜를 잡는 것, 병이 낫는 것, 그런 것에 대해 성령은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 우리가 근원적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또 다른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의 여부보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기에 너는 안전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또 암이 나을지 안 나을지의 여부보다 성령은 ‘너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세상을 이길 담대함과 평안을 주십니다. 이것을 27절은 이야기합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인생에 얼마나 평안이 많이 필요한가요? 평안이 없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 때문입니다. 계획한 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인간은 하루 앞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겐 더 많은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9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 사람처럼, 희생하지 않고 내 욕망대로 살고 진짜 문제를 깨닫지 못하며 그저 허무하게 살아가는 자들은 문제의식이나 갈등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어려움이 더 많을 것입니다. 육으로는 세상에 속한 자, 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늘 이중성으로 갈등하는 우리가 무엇으로 평안의 근거를 얻을 수 있나요? 바로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평안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나라에 군대나 경찰이 없다면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불안한 채로 살아야 될까요? 평화는 힘을 바탕으로 유지됩니다. 평화의 다른 말은 ‘힘을 통한 온전한 질서’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평화를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강력한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권력이 높은 사람도, 자기 인생과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며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하지만 ‘이겼다’는 단어를 우리의 편견대로가 아닌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이기실 때 이스라엘에서 권력을 얻기 원했습니다. 우리도 ‘승리’를 생각하면 이익, 성공, 돈, 힘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였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하나님이 온 땅의 주인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은 이야기합니다.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가 거대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세상보다 크심을 믿을 때 그 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평안입니다. 세상에서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앞에서, 어쩌면 내가 가장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영광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 육신을 좌우하는 강력한 힘들이 얼마나 많나요? 여기에 매이면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돈으로 더 맛있는 걸 먹을 수도, 더 좋은 차를 탈 수도, 더 재미있는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조금 맛없는 것 먹고, 조금 불편하고, 조금 단조로워도 하나님이 임재가 주는 만족으로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 그 축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절입니다.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떠나셔야 성령으로 그들에게 오셔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우리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온전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나약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나시고 어떻게 되었나요?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한지 몇 시간 만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권세와 영향력으로 담대하게 예수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보혜사 성령이 우리의 연약한 본질을 뛰어넘어 하늘의 담대함과 은혜를 보이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29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에서 벌어질 일을 얘기하십니다. ‘앞으로 너희가 하늘로부터 권능을 받아 이전과는 다른 모습인, 평안과 사랑으로 나를 전하게 되면, 내가 말한 보혜사 성령이 임한 결과임을 알라’고 깨닫도록 미리 얘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3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할 말은 거의 다 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아직 몇 장이 남아 있지만 내용이 거의 반복됩니다. 핵심은 ‘내가 떠나고 보혜사 성령이 오시며 너희는 그 성령으로 인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으로 인해 살아가며, 사랑하고 평안한 가운데 세상에 나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31절에서 말씀하셨나요.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신 것을 우리가 따라 살 수 있도록 모형을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의 끝은 십자가였습니다. 결국 우리에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이 사랑을 드러내며 십자가의 길에 서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충만히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