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만일 이 천년 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오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반응을 할까요? 저 조차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 안에는 인간의 본질적인 영적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서 인간의 본질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영적 본질은 무엇인가요?
1. 교만함과 강퍅함입니다. vv.43-44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예수님은 사마리아에서 이틀 간 머무시면서, 사마리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시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고자 하셨습니다. 명절 기간에 남쪽의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명절을 마치고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가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시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일까요? 이전에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대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 13:55-57)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예수님의 가족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아버지인 요셉은 이미 죽어서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 내에서 예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아버지처럼 역시 목수였기에,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배척을 넘어서 심지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회당에서 전하니,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눅 4:28-29)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을 잘 안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에는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이런 반응을 ‘교만함’이라고 합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전부 알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표면적인 일부만을 알았는데,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여 예수님의 존재를 배척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반드시 강퍅함이 뒤따릅니다. 내가 판단한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대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배척을 넘어서 예수를 죽이고자까지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두 사람만 가지고 있는 교만과 강퍅이 아닙니다.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본질적 근원적 모습입니다. 성경은 교만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의존하는 영이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교만하게 반응하며, 그 결과 하나님이 중요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은 개, 돼지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피가 더러워졌기에 정상적 인간이 아닌 괴물과 같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도 이단적 행위를 하는 사마리아인을 더더욱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요? 고통과 학대로 마음 안에 겸손함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의존할 수 있는 외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는 근원적 마음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깊은 고통 가운데, 마음이 낮아져서 하나님을 믿고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겸손해지니 하나님의 말씀에 부드럽게 반응하고 순종하는 온유한 태도가 나타난 것입니다.
[42] …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
온유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니, 예수님을 구주라고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온유함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영적 겸손함과 온유함을 갖추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 가운데 눈에 보이는 것만 의존하며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사람들을 찾으시나요?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가난함, 마음이 무너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만 하나님의 돌보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기 전에 우리의 마음의 교만과 강퍅함을 깨트려나가십니다. 이 과정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교만하고 강퍅한 채로 살면 스스로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은 가장 비참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하나님만 의존하며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자로 만드셨는데, 인간이 죄로 인해 괴물과 같은 존재로 변해 자기 힘을 의존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서 고통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겸손함과 온유함을 배워 안식을 얻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어떻게 쉼을 얻을 수 있나요? 예수님을 통해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참 안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를 통해 얻게 될 안식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을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교만과 강퍅을 벗어버리고 영혼 안에서의 변화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을 가지게 될 때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다른 사람들보다 의존할 것이 없고 가난하고 고통 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이런 안식을 경험했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도 가난하고 멸시받던 사람들이 먼저 큰 은혜와 자유를 누렸던 적이 있습니다. 백정이었던 ‘박성춘’이라는 사람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1860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백정이라 본인도 백정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성경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인구조사의 수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양반과 대화를 할 때는 무릎을 꿇고 대화해야했습니다. 누구나 성인이라면 상투를 트고 갓을 써야 하는데, 이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갓을 쓰지 않았기에 인간 취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그 사람을 보며 백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로 말미암아 박성춘 씨 아내가 포졸에게 매를 맞아 죽게 됩니다.
박성춘 씨는 자기 아이들마저 이런 고통에서 매인 삶을 살아서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시 사무엘 무어라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자신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를 그 곳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무어 선교사님의 한국 이름이 모삼열입니다. 그러던 중 박성춘 씨가 콜레라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무어 선교사님께 이야기를 하고 선교사님이 자신의 친구인 에비슨 선교사님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제중원이라는 왕을 치료하는 곳에서 의사로 섬기던 에비슨 선교사님이 박성춘을 치료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왕이 내준 가마를 타고 와서, 마을 입구에서부터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에비슨 선교사님의 헌신적 치료에 박성춘 씨는 회복이 되었고 모삼열 목사님이 목회하던 곤당골 교회에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백정인 박성춘이 교회에 나오지 곤당골 교회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양반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드릴 수 없다고 반발하였습니다. 모삼열 선교사님은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같다고 이야기하자 양반들이 교회를 나가 따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박성춘씨는 인간취급도 받지 못했던 자신을 향한 모삼열 목사님의 변호에 감동하여, 그때부터 헌신을 다해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3년 만에 교회가 부흥해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따로 나가서 예배드리겠다는 양반들이 모인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불에 타서 예배당이 사라졌는데, 이 교회를 곤당골 교회가 돕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 두 교회는 다시 하나로 합치게 됩니다. 이 교회가 후일에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숭동교회’가 되었습니다. 128년이 된 승동교회에서 한국 교회사에 유명하셨던 곽안련, 김익두 목사님이 담임목회를 하였습니다. 백정이었던 박성춘씨가 그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기다가 초대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은 제중원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박성춘 씨는 백정들의 인권을 위해 계속 애썼고 결국 백정들도 갓을 쓰고 상투를 틀 수 있도록 왕실의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정이었던 박성춘 씨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이야기는 복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자에게 임하여 어떻게 자유와 안식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증거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영적 본질은 무엇인가요?
2. 기복적 이기심입니다. v.45
[45a]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
갈릴리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왜 영접한 것일까요?
[45b] …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병자들을 치료하신 놀라운 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요 2:23)
왜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싸인으로서의 기적이기 때문에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환영한 이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이 자신에게도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기복적 반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때,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4-25)
여기서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믿었다’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셨기에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도구로 삼으려는 기복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가 나를 이용해 이익을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철저히 자신을 감춥니다. 자신 안에 욕망이 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관계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점점 쇠락하고 있습니다. 작년의 한국 출산율 통계가 0.84명입니다. 여자가 평생토록 낳을 수 있는 아기의 명수가 0.84명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평균 출산율이 2.5명인데, 한국의 출산율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해인 1971년에 신생아 숫자가 102만명이었는데 2020년에는 27만명이되었습니다. 인구가 줄면, 앞으로 한국에는 엄청난 많은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작년에는 더 의미가 있는 것이, 데드크로스라는 ‘출생하는 아이’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은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구는 줄어드는데,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현저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20대에 종교를 가진 사람이 20%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그 밖의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20년 전에는 7-80% 정도 되는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이제 자기의 기복적 욕망을 하나님이 아닌 돈을 통해 충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통해 부자가 되거나 병이 치료받기를 원해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집에 살고 풍요를 누릴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돈이 인간의 기복적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에는 동네 커피숍들이 사라지며 스타벅스만 남게 되는 것처럼 큰 교회만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 살아남아, 기독교 역사를 이룬 것처럼 복음에 반응하며 예수를 붙드는 성령 받은 자들이 교회에 남아, 가짜는 사라지고 진짜가 일당백의 영향을 미치는 시대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늘 복음은 거짓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진짜는 가짜를 이겨내고 살아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가짜를 이겨내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영을 가지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기복의 시대가 끝이 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복음으로 어떤 큰 일을 행하시는지 증언하는 자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