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1일 주일예배 설교문
어떤 일에 있어서 첫 번째로 시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행하신 표적 또한 아주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요?
안식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1a]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짧은 1절 상반절만 보더라도 이 표적이 예수님이 안식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힌트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흘째라는 것입니다. 사흘째라는 것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신 후 사흘째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시간에 대한 설명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더하고 나면 이 날이 7일 째 안식일의 날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창세기 1장처럼 틀을 만들고 내용물을 넣은 후에 7일 째 안식하셨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고자 한 것이 틀이 만들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내용으로 채워진 후 이 사흘 째가 안식일을 의미하는 날인 것입니다.
또한 혼인잔치라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쁜 날입니다. 성경에서도 결혼식은 가장 큰 기쁨을 가져오는 날이었습니다. 이 기쁨은 안식을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안식이란 내 안에 평안함과 만족의 충만함으로 결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흘째, 혼례의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안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이날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1b] …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단순한 손님이 아니라, 하인도 다 알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혼식은 고대에 있어 지역의 가장 큰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지금도 전통이 보존된 나라에 가면 집안 사람만 모여 결혼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축제에 참여합니다. 신랑신부가 마을 전체를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이 그 기쁨을 함께 누립니다. 그런데 가장 큰 기쁨과 가장 행복한 날에 위기가 발생합니다.
[3a]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
사실 이게 우리에게는 무슨 큰 일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포도주가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공급할 수 있는 기쁨의 도구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했냐면, 결혼을 주최하는 측에서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신랑신부를 고소할 수 있었으며 벌금을 내게 되고 마을 전체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신랑신부에게 위기의 상황이 찾아온 것입니다. 기쁨을 보증할 수 있는 도구가 사라진 것입니다. 포도주는 성경에서 기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사 24:11)
포도주 하나가 없다고 이렇게 부르짖고 기쁨이 소멸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은 ‘잔치’,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 하나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포도주가 사라졌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인 것입니다. 기근, 질병, 전쟁이 닥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혼례 중에 포도주가 떨어져 위기를 경험한 상황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다 만족하길 원하고 기쁘고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 항상 이렇게 결핍이 찾아와 힘들게 할 때가 얼마나 많나요? 건강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돈만 원 없이 쓸 수 있다면, 그러면 우리 인생 가운데 불안과 힘듦이 없을텐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핍은 인생에서 큰 힘듦을 가져다줍니다. 결핍없는 인생이라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 많은 결핍들이 우리에게 모든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 돈이 충만하면 좋겠지만, 진짜 중요한 것이 결핍되면 고통을 가져오게 됩니다. 대표적인 결핍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야기하는 결핍 중 하나입니다. 사랑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일까요? 결혼을 한 후, 아기를 출산한 후, 어느 순간에 사랑이 결핍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안에 없는 사랑으로 좌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이 결핍될 경우, 우리 안에 파괴와 고통을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결핍 안에는 죄가 존재합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물질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왜 부족하다고 느낄까요? 소수의 사람이 욕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만을 위해 붙들고 집착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수의 부자들이 전세계 사람들의 물질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부자는 한 사람이 수십조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데, 가난한 사람은 하루 한끼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에는 밥을 먹지 못하고 있는데 어떤 곳에는 곡식이 많아 불에 태우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욕망을 불리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많이 있어도 부족함을 느낄까요? 죄가 이런 결과를 가져와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이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갈망하는 사랑의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행복하고 만족하며, 기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랑의 통치를 확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깨어진 틀 안에 생명이 담길 수 없게 되어 인간은 끝이 없는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죄가 인간을 갈망하고 고통하게 만들어, 끊임없는 쉼을 갈망하는 상태가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에 안식은 죄의 문제가 해결돼야 누릴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질 때,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필요한 수준이 다 채워지고 그 이상을 가져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얼마나 풍성한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만족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자장면을 먹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졸라서 자장면을 먹지 않습니다. 너무 풍요해졌습니다. 자장면을 시키면 탕수육도 곁들여 먹습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가보면, 어쩌다가 자장면 하나만을 먹었을 때가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반장 선거 때, 저는 학생들에게 자장면을 사주겠다는 공약을 했더니 100%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당선된 뒤에 자장면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 학생들 모두가 와 자장면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장면을 사준다고 해도 예전처럼 아이들이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모든 결과는 불만족은 증가하게 됩니다. 훨씬 더 불안하고 훨씬 더 배고픕니다. 우리 안에 진짜 갈망이 영적으로 채워져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들로 채우려고 하다 보니 갈망이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병을 치료할 치료제를 주어야 하는데, 엉뚱한 것을 주니 점점 더 병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3b] …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사실, 예수님이 이전에도 기적을 행하셨으면 충분히 이야기할 만합니다. 그런데 오늘 벌어진 일이 첫 번째 표적입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이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30년간 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탁한 것일까요? 마리아가 기대할 만한 일이 이전에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를 데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제자를 거느린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가 되겠다는 것은 스승의 삶을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전수받아 스승과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랍비 아니고서는 제자들을 거느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를 보고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30년이나 흐른 것입니다. 이 때가 이분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드러낼 때인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상한 반응을 하십니다.
[4a]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지금이나 고대나 어머니를 향해 어떤 경우에도 여자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나쁜 표현이 아니라, 나이든 여성을 향해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러나 엄마를 향해 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엄마라고 부르다가 어머니라고 부를 순 있지만, 예수님께서 왜 여자라고 부르신 것일까요? 이제 예수님과의 관계는 사적 관계에서 공적 관계로 변화된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의 어머니와도 공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의 원문은 단순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관용어로 ‘이 일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요? 이 말은 뒤에 나오는 구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4b]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서의 이 때는 아주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때는 특정한 시점을 가르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 13:1)
이 때는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때와 포도주를 만드는 때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죽음의 순간에 포도주를 만드셔야 하는데, 미리 만드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이 자신의 피로 포도주를 공급하실 때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메시야가 오시면 포도주를 공급하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렘 31:12)
메시야가 오시면 이제는 더 이상 결핍이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풍성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나요? 우리의 걱정과 근심이 사라진 그 날이 메시야가 임하실 때라는 것입니다. 이 때, 새 포도주가 공급되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기쁨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척하기 전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때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아서 기뻐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일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또다시 불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근원적 만족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이 싹튼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집이 망했을 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시니 저는 더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10년 정도 사니,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에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인생 전체를 책임질 큰 돈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조금씩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저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두려움의 근원이 제거되니까 점점 돈이 없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영혼의 근원 안의 두려움은 인생 가운데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죄가 해결되어야 공허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의 피를 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왜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 포도주가 상징하는 기쁨을 예수님이 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 안에 진짜 만족과 행복을 주실 수 있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행하며 기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피가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는 근원이며, 예수가 아니고서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기에 예수를 믿어야만 함을 기억하기 위해 성찬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내 안에 젖어들며, 내가 무엇을 의존하는지를 깨달은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세상의 물질을 향한 열망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목마름에서 자유케 해달라고 간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영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이해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제 무엇인가를 하실 것은 같기에 내가 조금 더 밀어붙이면 무엇인가 하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기회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땅에 왜 오셨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시를 하십니다.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정결예식에 쓰는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정결예식을 꼭 했어야 했습니다. 거룩한 곳으로 갈 때, 더러운 모습으로 가면 안 되었기에 씻기 위한 항아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항아리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인간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거룩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더러운 채로 죽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형으로 보여주십니다. 씻어 깨끗하게 되면 축복을 받아 교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식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더러운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것이 그냥 형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로 와 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안 외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 할 때는 은혜롭습니다. 반복되면 인간은 감동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빼버린 것입니다. 진짜 이것을 하는 이유는 본질을 찾기 위해서인데, 인간은 반복하면 형식이 되어 버립니다. 정결예식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그저 손만 닦는 형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나요?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 예수가 이렇게 아무 소용없어진 그 자리로부터 다시 한 번 새롭게 진짜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참 황당한 명령입니다. 여기 있던 하인들은 왜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순종해 가져다 주었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9a]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하인들은 정말 그 모든 상황을 보았기 때문에 얼마나 놀랐을까요? 연회장은 어떻게 이야기하나요?
[9b]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연회장의 말이 왜 성경에 기록된 것일까요? 사람들이 취한 상황에서 물을 포도주로 착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학자는 통 안에 포도주 찌꺼기가 있어서, 물이랑 희석해서 마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술 먹고 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음식이 제대로 공급되는지를 확인하는 행사 책임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를 공급하셨음을 연회장을 통해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영광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드러날 때입니다. 어떤 속성이 드러났나요? 안식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모형입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포도주를 공급하시나요? 예수의 피로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결핍으로 갈망하는 우리에게 예수의 피로 안식과 만족을 주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이 땅에서는 끝나지 않습니다. 밥을 하루만 먹지 않아도 힘이 듭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많은 결핍이 있습니다. 언제 만족을 누릴까요?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를 누리며 함께 기뻐할 때 우리는 경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문득문득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서는 이보다 더 풍성하겠구나 이렇게 만족하며 행복하겠구나를 맛보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