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사도행전 10장은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본문을 통해 기독교가 유대인만의 종교가 아닌 온 세상의 종교로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혁명적 사건으로 초대교회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고 하나님을 유대인의 방식으로 섬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큰 유익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고, 제약이 많은 ‘코셔’ 음식만 먹고, 머리에는 키파를 쓰고, 팔에는 가죽 끈을 묶고 기도하며 안식일 계율에 철저히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규칙이 아닌 ‘예수’만 믿으면 되는 시작점이 바로 사도행전 10장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30절과 31절을 보시면
[30]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하나님도 그를 아시고 심지어는 천사까지 보았지만 고넬료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은 제한적이고 종교적인 형태를 띤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온전히 구원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은 무엇인가요?
1.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vv.36-43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43절 말씀입니다.
[43] …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예수를 믿는 유익은 천국, 평안, 봉사 등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지만 ‘예수를 믿는 것’의 본질은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이 복음의 본질이자 핵심인 이유는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죄의 영향력이 인생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죄 사함의 두 가지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두 번째는 영적 죽음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43절에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을 하기 전에 38절에 예수님이 마귀로부타 사람들을 구원하신 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설명할 때 가장 먼저 한 말이 바로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예수님이 고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것이 죄 사함과 관련이 있나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로 인해 마귀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
심지어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까지 부르십니다.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착한 사람이 있고, 예수를 믿어도 악질인 경우도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이 착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소속되었는가로 결정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본질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전부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의 노예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에베소서 2장 2절을 보시면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제가 중학생 때 친구들이 듣는 팝송을 들어보려고 라디오를 켰는데 어머니께서 마귀 음악은 듣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라디오를 끄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귀들이 팝송으로 아이들을 조종해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설교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음악인 중에 실제로 사탄에게 빠져서 내 주인은 마귀라는 가사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또 좋은 가사의 노래들도 있습니다.
팝송만 듣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와 관계없을 수 있나요? 아닙니다. 에베소서에 나와 있듯 마귀는 세상 풍조를 통해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풍조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문화입니다.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흐르다 집단화되어 그것을 공유하게 되는 것을 ‘주의’라고 부릅니다. 물질주의나 쾌락주의는 마귀가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자 만들어낸 풍조 즉 영향력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물질주의나 쾌락주의에 영향 받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우리는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 같고 새로운 자극이 있으면 기쁠 것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종종 헛된 것을 추구합니다. 즉 마귀는 단순히 악한 음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양한 영향력을 만들어내서 남들처럼 살지 않으면 잘못된 것 같아 남들처럼 살라고 사람들을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남을 짓밟고, 돈을 벌고, 높은 곳에 올라가야 행복하다는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마귀적인 영향력 가운데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마귀는 세상의 힘으로 사람들을 위협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을 보시면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지금은 사라졌지만 호랑이를 만났던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보는 순간 몸이 굳거나 기절하기 때문에 호랑이가 쉽게 물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크기의 두려운 존재 앞에 저항할 수 없이 마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적 영향력의 힘입니다. 영향력으로 내 생각을 지배해서 내가 어떠한 삶을 살지 않으면 미래가 망할 것 같아 불안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미국에는 ‘프레퍼’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준비하다’ prepare에서 나온 명사로 직역하면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준비할까요? 종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 프레퍼들이 증가해 약 2천만에 달하는 이들 덕분에 종말 산업, Doom’s Day Business가 호황이라고 합니다.
이 사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미래의 생존 식량인데 미국에서 가장 큰 생존 식량 회사 이름이 누만나입니다. 누만나 생존 키트에 동결 건조된 식량은 25년 동안 음식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하니 소수의 열성분자 정도나 관심이 있을까 싶었는데 작년부터 코스트코에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대중화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핵전쟁을 대비해 집 지하실에 생존 대피소를 만드는 사람도 너무 늘어서 신청 후 1년 이상 기다려야 된다고 합니다. 집보다 견고한 대피소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업들은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만든 격납고를 개조하고 있는데 두당 최대 수십 억임에도 이 곳도 줄을 섰다고 합니다. 마크 저커버거는 하와이에 3,500억을 들여 지구가 완전히 멸망해도 물과 전기와 식량을 자급자족하여 영원히 살 수 있는 대피소를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이게 다 무엇인가요? 세상이 모두 망해도 나만 신처럼 살고 싶어하는 두려움과 자기 사랑의 혼합물이며 마귀에게서 온 마음입니다. 한 편으로는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이 문화가 되고 사람들이 따라가는 트렌드가 되며 내 미래를 나의 힘으로 주장하여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엄청난 부자가 아니고 한국에는 아직 프레퍼가 유행이 아니어서 그렇지 다른 영역에서는 계속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너를 안전하게 만들어, 네 미래는 걱정해, 이런 소리에 넘어가서 자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수단에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귀가 만든 욕망과 두려움으로 끌려가는 노예의 삶을 벗어 던지고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3천 억 짜리 지하 벙커를 만든다고 우리 미래가 보장될까요? 미래는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땅의 생명, 땅의 쾌락, 땅의 안정은 우리의 근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중심 가치가 되어버리면 마귀가 시키는 대로 돈, 시간, 관심을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사용하다 죽는 비참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만 예수를 믿어 마귀의 유혹과 핍박에서 자유롭게 된 영혼은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죄 사함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죄에서 벗어난 자는 무서운 영원한 죽음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39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예수님의 이 죽음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셨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증거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을 보시면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는 인간을 죽음이라는 결과로 치달아가게 만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는 십자가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40절입니다.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죄에서 벗어나셔서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명합니다. 예수님 혼자만 부활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는 더욱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 또한 부활을 소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에 매어 있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감기에 걸리면 두렵지 않지만 암에 걸리면 두려워합니다. 암은 죽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예수의 능력이 마귀와 죽음에서도 벗어나는 같은 능력이라는 것에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41절입니다.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나신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마귀를 이기셨음을 확신하기에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예수를 믿어 마귀의 지배에서 자유케 되면 죽음의 공포에서도 자유케 됩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것을 믿지 못하면 얼마든지 교회에 다니고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죽음의 공포 혹은 마귀의 노예로 사는 고통을 지나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진짜 예수 믿는 사람 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내 힘으로는 마귀나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할 때에야 예수를 붙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1,700년대에 감리교회를 창시한 존 웨슬리 역시 그러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께 라틴어, 헬라어를 배우고 옥스퍼드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워낙 탁월하여 20대에 옥스포드의 신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식민지에 선교를 하러 배를 타고 떠났는데 폭풍우가 닥쳤습니다.
존 웨슬리는 죽음의 공포로 인생이 망가진 듯 몸과 정신이 마비가 되어 벌벌 떨고 있는데 만면에 미소를 띠고 평안한 모습으로 찬양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라비안이라는 독일계 기독교 분파로 나중에 세계 선교에 큰 헌신을 하게 됩니다. 이들이 누구길래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평안할 수가 있는가 궁금해하며 미국에 지내는 동안도 그들과 교제를 했습니다.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의 리더가 그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 안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존 웨슬리가 대답하지 못하자 리더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하고 개인적인 질문을 했는데 이에 대해 웨슬리는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압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지도자는 이어서 ‘당신은 바로 그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당신을 죄에서 구원하셨음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웨슬리는 그저 ‘예수님이 저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기를 바랍니다.’라고 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이고 신학교 교수였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 앞에서는 ‘바랍니다’라고 믿음 없음을 반증하고 만 것입니다.
미국에서 처참한 선교적 실패를 겪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폭풍우를 만났는데 그는 또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뒤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위험이 없을 때에는 나 자신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이 가까이 올 때에는 나의 마음은 공포에 빠진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할 것인가 이제 나의 논쟁은 끝났다. 주여 믿음 없는 저를 도와주소서.’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회에서 로마서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며 이제야 구원받았다고 느낀 날의 일기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이날 이후 달라져 현재 수억 명이 믿는 감리 교단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분이 나의 참 구주라고 마음으로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라고 믿으시나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유를 얻고자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시며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는 예수를 유일한 구주로 믿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은 무엇인가요?
2.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vv.44-48
두 번째로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은 무엇인가요? 성령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44절 말씀입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렇게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내려오신 것은 역사상 한 번 있던 신비한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8장 17절입니다.
8: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것도 사도행전에만 기록된 일입니다. 지금은 안수하면 성령이 임하고 안수 안 하면 성령이 안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번 강조했듯 사도행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형태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기록된 책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을 확증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성령이 임한 것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성령이 임하시는 다른 증거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45절입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곳에서 안수하지 않은 것은 이들이 이방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 뿐 아니라 고넬료의 친지가 다 모인 상태인데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씀을 전하기는 했지만 문둥병자처럼 더러운 사람으로 여겨지던 이들에게 손을 댈 수는 없자 말씀을 전하는 중에 성령이 직접 임하신 것입니다. 46절입니다.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성령이 임한 증거가 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높인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을 성령이 임하면 방언을 한다고 오해해서 모 교단은 세례 받기 전에 방언 교육을 시키는 폐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헬라어로는 ‘글로사,’ 영어로는 ‘tongue’으로 그저 ‘혀’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이 남을 파괴하고 저주하고 비난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하던 혀를 붙잡으셔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일에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마저도 나의 욕망만을 아뢰던 혀를 하나님이 사로잡으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게 바꾸시는 것입니다. 방언은 다른 나라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혀를 사로잡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의 증거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혀를 사로잡으셔서 내 본질로는 할 수 없는 말과 찬양을 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방언 등의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사실을 진짜 믿고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바로 성령이 임하신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증거는 무엇인가요? 고린도전서 12장 3절입니다.
고전 12:3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 분을 구원자라고 믿고 있다면 이것 역시 지적 동의가 아닌 존 웨슬리가 경험한 것 같은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오셔야 하나님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입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함께 계심을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이 복음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성령을 훨씬 가깝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누리는 가장 큰 유익은 설교를 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중에 성령이 깨닫게 하시며 확신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실 제 설교로 바로 다음 날 누가 변하셨는지는 거의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가끔 보여주실 때도 있지만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제일 큰 유익은 말씀을 전할 때 제 안에 확신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하지 않았다면 모호함을 품은 채 수년이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씀을 전하며 이 길이 맞다는 확신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시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한 약사 집사님이 동일한 고백을 하셨습니다. 모태 신앙이지만 주일예배만 참석하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불신자 남편이 그렇게 열정 없이 다닐 거면 가지 말라고 하자 그 때부터 성령님이 정말 계신지, 내가 진짜 예수를 믿는지 의심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몽골 의료 선교 공고를 보고는 참여하기로 하셨습니다.
선교 교육을 받는데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등의 전도 구절이 가득 적힌 몽골어를 외우고 시험 보는데 워낙 말수도 없으시고 내향적이신 분이라 자신은 절대 말은 하지 않고 약만 나눠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실제 처음 며칠은 일만 하셨습니다.
한국에서 의료팀이 왔다고 하니 수백 명이 수일씩 걸어오고 밤을 새고 줄을 서고, 전도대들은 그들에게 빵과 커피를 나눠주면서 몽골어로 전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과연 알아들을까? 소용이 있을까? 의심을 하는데 그 어설픈 몽골어를 듣고도 믿겠다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에 자신도 용기를 내어 전했는데, 본인도 백 프로의 확신은 없이 그저 종이에 적혀진 글자로 예수를 전했는데 듣는 분이 예수를 믿겠다고 해서 그 사람을 몽골어 잘하시는 선교사님에게 데려다 주고 같이 기도하는데 엄청난 감동을 느끼신 것입니다. 말로 하는 사역이 아니구나, 성령이 역사하셔서 몇 마디 전하지 않았는데 울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내 안에도 오시고, 저 분 안에도 오셔서 저들을 구원하시는구나를 경험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몽골 선교를 10여 년째 빠지지 않고 매년 가시는 것을 보며 이분은 정말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과 성령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에도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시나요?
우리에게 정말 복음이 중요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이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면, 특히 성령이 우리 주인 되신다는 것을 더 깊이 더 강하게 느끼려면 복음 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의미 없는 것 같은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구원할 자를 불러 모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경험하며 우리 또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하나님 저도 기회를 포착해 복음의 말씀을 증거함으로 저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으며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시며 복음을 전하실 때 여러분 인생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