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 장우현 목사
룻기 3장 1절부터 11절까지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 이라는 제목으로 그 첫 번째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보통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면 교회 봉사나 프로그램들, 전도나 선교와 같은 '교회 일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목회자들이 하는 일들을 주의 일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포함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렇게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의 본질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다들 모여서 회의도 하고 열심히 섬기고 규모도 커지는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할 때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오늘과 다음 번에 보게 될 룻기 3장 말씀에는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가 각자 열심히 무슨 일들을 한다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구절들을 한 번 보실까요?
[1b] ...구하여...복되게 하여야... [4b] ...네가 할 일... [5b] ...내가 다 행하리이다... [6b] ...명령대로 다 하니라 [16] ...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 [18] ...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지금 이 등장인물들은 구원에 관한 맥락 안에서 어떤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살펴보면 구원에 관한 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1. 자기부인을 통해 이웃의 안식을 구하는 것입니다.(1, 6-10)
룻기 2장에는 룻을 보호해주고 양식을 공급해주는 보아스를 본 룻과 나오미가 결국엔 보아스가 기업무름, 땅을 회복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갖고 추수 기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야 남의 밭을 전전하면며 해코지를 당하는 것에서 보호 받을 수 있고, 매년 끊임없이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해코지를 당하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던 이유도 하나님께서 보호와 공급을 해주신다는 그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의 땅이 이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들로 땅을 잃게 됐을 때 강제적인 의무는 아니었지만 친척들을 통해 그 땅을 회복해주는 제도를 만들어 두셨고, 나오미는 그것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추수가 모두 끝나서 더 이상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지 못하게됐습니다. 이젠 먹을 것을 꾸러 다니거나 종노릇을 하거나 구걸을 해야 할 삶의 기로에 서게 됐는데 보아스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일들을 해서는 룻 한 사람의 생명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늙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나오미는 소망을 잃은 것 같은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희도 이 두 사람과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임시적인 보호와 공급을 해준 보아스가 기업무름이라는 완전한 보호와 공급을 해줄 것을 소망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저희는 재림 하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완성해 주실 것을 소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이쯤 되면 '내가 살아있을 때 오시진 않으시겠지. 그걸 기대며 사는게 더 이상한거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저희도 모르게 마음 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이제 오시는 건 둘째 치고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며 나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고 계신거는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일상은 계속되고, 삶의 이런 저런 막다른 길에 선 것 같은 상황이나 견디기 힘든 관계의 어려움에 직면하면 순식간에 소망을 잃은 자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내가 내 삶의 소망을 찾아 나섭니다. 지금 겪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들을 구현하기 위한 삶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상'의 만족과 성취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자기 욕망을 추구할 돈도, 능력도 배짱도 없어서 초라해 보이는 인생에 안주하거나 무기력해집니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눈에 보이는 일상'을 잃을까 두려워 그것을 붙잡는 것에 소원을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삶은 언제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욕망을 추구하다가도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도 하고, 두려움 가운데 살다가도 대박을 추구하기도 하죠. 눈에 보이는 일상의 삶에 매여서 종노릇을 하는 삶입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의 종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듯이 룻과 나오미가 구걸하고 종노릇 하게 될 삶에 맞딱뜨렸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기로에 섰다는 것입니다. 저희도 예수님의 재림과 구원을 삶의 중심, 삶의 목적, 삶의 소망으로 두지 않을 때 어느 순간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의 기로 앞에서 룻과 나오미는 어떤 일을 하게 된 것일까요? 나오미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너를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한다는 것은 룻이 결혼해서 남편과 가정을 얻을 곳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문화 안에서는 남편이 아내와 가족을 보호해줬고, 일해서 양식을 공급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나오미가 며느리인 룻이 자기 친척 보아스와 결혼해서 자기 기업을 물러줄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룻을 위한> 나오미의 이런 순수한 의도는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도 드러났었습니다.
1:9a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위로가 안식과 같은 단어입니다. 나오미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이 때부터 룻을 어떻게든 데려와서 친척과 결혼시키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자기와 상관 없이 룻이 결혼을 해서 안식 얻기를 바랬던 것이죠.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나오미의 상황은 어떤가요? 룻이 없으면 곧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오미는 시어머니로써 룻이 자신을 봉양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 권위도 또 생명도 내려놓고 룻의 안식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 인생에 대한 내 주장과 권위라는 이 욕망과, 죽을 것에 대한 두려움도 내려놓는 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하죠. 그런데 왜 나오미는 굳이 지금 자기부인을 통해서 나오미에게 안식을 주고자 했던 것일까요?
사람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의존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 땅의 대부분의 것들은 모두가 원하는 만큼, 공평하게 갖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가운데 내 욕망과 두려움만을 해결하려는 이기성을 추구하려다보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웃에게 상처와 고통과 피해와 수고를 안길 수 밖에 없습니다.내 안식을 내가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이기주의, 개인주의, 자기보존의 욕구는 오히려 모두의 안식을 깨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인간 관계 가운데 서로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나오미가 하는 일들이 룻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나오미는 룻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타작마당에 보내서 보아스 옆에 누워있게 하는 계획이 있었고 룻은 그 계획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타작은 남자들의 일이었고 타작을 하면서 잔칫술에 취하기도 했기 때문에 성경에서 타작마당은 음행의 공간으로도 묘사됩니다. 위험한 곳이면서 또 음행하는 여자로 오해 받아 수치를 얻을 수도 있는 곳이죠. 게다가 룻은 그런 타작마당에서 자고 있던 마을의 존경받는 보아스의 옆에 누웠습니다. 보아스가 나쁜사람이었다면 안좋을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고, 이것은 영락 없이 음행하는 여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룻은 이런 수치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오미의 계획에 순종한 것일까요? 9절에 답이 있습니다.
[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옷자락을 펴 덮으라는 말은 어미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덮어 주듯이 나를 보호해달라는 말인데요, 청혼을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해서 보호와 부양을 할 의무가 있는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룻은 청혼을 하면서 이 결혼의 목적이 자신의 안식이 아니라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주길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오미의 기업이 물러지면 그 유익은 룻도 누리게 되겠지만 룻기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무를 자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바로 나오미가 자기 부인을 통해서 룻의 안식 얻기를 구했다면 룻도 수치와 죽음을 무릅쓰는 자기 부인을 통해 나오미가 안식 얻기를 구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구했던 안식이 무엇이길래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일까요?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쉰다는 것이 안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일까요? 앞서 살펴봤듯이 하늘 소망이 없는 자들은 모든 것에 한계가 있는 이 땅에서 치킨게임을 하듯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해야 합니다. 죽기까지 사랑할 것 같던 연인 사이에도, 수십년 된 부부 사이에도, 안그럴 것 같던 친구 사이에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친척 관계에도, 내가 낳은 자식과도 투쟁이 생기죠.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연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런 서로를 보호하지 못하고 경쟁상대로써 정죄하고 짓밟으며 삽니다. 욕망을 추구하며 성공한 자들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속물 같다고 욕하고, 그러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고 사회 탓 상황 탓 남 탓하는 거지 근성 때문에 그렇게 밖에 못살게 됐다고 조롱합니다. 그러면서 내 죄와 연약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뒤로 감춥니다. 내 의, 내 잘나 모이는 것들을 자랑하고 그것을 내 힘으로 지키며 남을 깎아내리고자 발버둥 치는 이런 삶은 수고스럽고 무거운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의 잘못을 떠넘기고 지적하면서 자기의 수치는 곧 썩어질 나뭇잎으로 가리고 노동의 수고와 출산의 고통이라는 저주를 안고 사는 모습이 바로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그런 수고롭고 나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피로 그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죄의 정죄와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해주셨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을 공급받는 통로를 열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면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오라고 하셨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막 8:34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바로 십자가에 나의 자아를 못박는 자기부인을 하는 것이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도 자기 머리 두실 곳 조차 없으셨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던 분이신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 부인을 하시며 누구의 안식을 구하셨나요? 예수님의 형제이자 이웃, 바로 저희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사명으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와 룻도 소망을 잃은 것 같은 상황 가운데 꿈틀꿈틀 올라올 수 밖에 없는 욕망과 두려움을 부인하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을 걸으며 이웃의 안식을 구한 것입니다.
저희도 삶의 많은 부분들이 이처럼 내 코가 석자인 상태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릴 때는 노느라 바쁘구요, 학생 때는 대학 입시하느라, 대학가면 취업준비, 취업하면 결혼준비, 결혼하면 집과 차 대출금 갚으며 자녀양육, 애 좀 키워 독립시키면 그 동안 못했던 내 인생 좀 누리려고 하지만 곧 들이닥치는 손주 봐줘야죠, 손주 봐줘서 유치원이 라도 보내면 연로한 부모님 모시고, 그것까지 끝나면 이제 나오미처럼 내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황에 처합니다. 저희는 이런 고된 인생 속에서 내 안식도 찾기 힘든데 누구 안식을 신경쓰냐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런 상황 속에서 내 안식을 위해 발버둥 칠 때 안식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안식을 위해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모이기가 어려운 이 시기, 어쩌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마귀로 인해 모두 막혀버리고 뭔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 처럼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저희가 어디에 있든, 어떤 관계를 맺든, 어떤 상황에 있든, 작은 일을 하든 큰 일을 하든, 돈을 많이 쓰든 적게 쓰든, 자기 부인이라는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이웃이 예수님을 통해 안식을 얻길 구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깨기억하며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기쁨과 안식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무엇인가요?
2. 지혜를 통해 이웃의 안식을 구하는 것입니다.(2-5, 11)
지금까지 말씀을 보면 나오미와 룻이 자기부인을 통해 이웃에게 안식을 준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안식은 죽기까지 자기 부인을 할지라도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와 결혼할 수 있도록 자기부인을 했지만, 보아스가 친척이라는 연결고리만 있을 뿐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회복시켜주셔서 보호와 공급을 해주는 기업무름 만들어 두셨듯이, 자식 없이 남편이 죽었을 때 가까운 형제나 친척이 대를 잇고 생계를 책임져주는 계대결혼이라는 제도도 만들어 두셨습니다. 계대 결혼을 통해 자식을 낳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남편을 통해 보호와 공급을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가까운 친척이긴 했지만 우선순위의 친척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낮에 룻을 보아스에게 보냈는데 우선순위자가 결혼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면 보아스가 결혼할 의사가 있더라도 난감해지고, 우선순위자가 결혼 의사가 없을지라도 상의도 없이 보아스에게 룻을 먼저 보낸 일에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은 마을에 가까운 친척들이라 다 알거든요.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나오미는 독특한 계획을 내놓게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 계획을 자세히 뜯어보면 상식선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그 술취한 밤의 타작마당은 위험하고 음행하는 여자로 오해받아 수치를 당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무리 룻의 안식을 위한 좋은 의도가 있더라도 당시 사람들도 이 계획을 들었다면, 어 저건 아닌데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룻에게 술취한 보아스의 옆에 누워서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정말 원하는 사윗감이 나타났다고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사랑하는 딸을 술취해 자고 있는 사윗감 옆에 눕혀서라도 결혼 시키실 분 있으신가요? 이런 일들이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위험하고 이상한 것인지 나중에 보아스도 룻을 보호해주기 위해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왜 이런 비상식적인 계획을 짠 것일까요? 성경에 나타나는 이렇게 상식에 어긋나보이는 두 가지 사건을 보면 답을 얻는데 도움이 됩니다.
라합이라는 여자는 거짓말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살려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선한 거짓말도 필요할 때가 있다고 그 본문이 설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본문은 목적만 선하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라합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과 가족들을 진멸하러 오는 정탐꾼들을 거짓말까지 하면서 살려줄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합의 집에 정탐꾼이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듣고 온 군인들이 라합의 한 마디 거짓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갔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자기와 가족들 모두 죽을 수 있는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나라 후손들이 살아 있었거나 이스라엘이 패배라도 했다면 매국노라고 테러를 당하거나 교과서에 실려서 몇 천년이 지나더라도 집안 대대로 욕 먹을 큰 위험이 따르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살려줬을까요?
수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여호와께서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어 경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영적 눈이 열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라합의 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짓말은 이 땅의 어떤 지식으로도 알 수 없는 하늘의 일들을 보는 눈을 열게 해주고,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혜를 가진 여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이 진짜 어머니를 가려내기 위해 아이를 반으로 쪼개려던 모습도 결과가 좋았으니까 저희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법정에서 그런식으로 죄인을 가리려고 했다가는 몰상식한 판사가 될 뿐만 아니라 판사 가운 벗어야 될 것입니다. 이건 그 때의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상식을 뛰어넘는 방법을 사용한 솔로몬도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놀랍죠? 하지만 이 두 가지 예로는 나오미의 계획도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직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한 명의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누굴까요? 네, 룻입니다.
여러분들은 룻을 순종적인 며느리의 본으로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를 자세히 보면 룻은 시어머니의 말을 정말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여자였습니다. 1장에서 나오미는 룻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여러번 권면했지만 당신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다!라고 당돌하게 말하며 따라왔죠. 나오미는 룻의 그 굳은 결심을 보고 말 문이 막혔습니다. 그렇게 따라와서 2장이 시작되면서 룻은 상의도 없이 이삭을 주우러 가기로 결정하고 나오미에게 통보합니다. 나오미는 [그래 내 딸아 가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딸같은 룻이 고생할까봐 떠나보내려고 했더니 자기 마음대로 따라와서 고생하러 나간다고 하는데 나오미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 가보라는 말 밖에 더 할 수 있었을까요?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3장에서도 결혼해서 자기 안식 찾으라고 그 위험한 곳을 보냈더니 시어머니 기업무름 해달라고 말한거에요. 여러분 이런 며느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착하고 잘 하는 것 같은데, 결국 지 맘대로 다 해.
그런데 룻의 이런 선택들은 성경과 세상이 보기에 굉장히 비상식적인 모습입니다. 구약 시대에 여성들은 남자에게 의존되어 있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 같아보이는 주도적인 여인상입니다. 성경에 이런 여인들이 몇 명 나오는데요, 모두 예외적인 케이스로 다뤄집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보기에는 그렇게 자기주도적으로 결정한 일이 자신의 자유와 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그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과 시어머니를 종처럼 섬기는 상식적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이 교회 다니는 며느리나 사위들도 이렇게까지는 못하지 않나요? 어버이날도 지금 얼마 안지났는데. 솔직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룻이 나오미의 말에 순종한 일이 있는데요 수치와 죽음을 무릅쓰고 보아스에게 청혼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보아스가 보기에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보아스는 나이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룻은 젊은 여자였기 때문에 보아스가 보기에도 젊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보아스는 룻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이 나오미를 위한 일이었음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오미에게 상식적인 사랑을 뛰어넘는 인애, 바로 헤세드적 사랑을 베풀어 왔지만 지금 더 큰 인애를 베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런 룻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11]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탁월하다는 뜻의 이 현숙한 여인이라는 표현은 잠언에서도 똑같이 나오는데요, 잠언에서 이 여인은 지혜를 의인화한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탁월하고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보아스가 칭찬한 이 상식적이지 않은 계획은 나오미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결국 나오미도 지혜로운 여자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죠. 이 두 사람이 서로의 안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상식을 뛰어넘는 지혜를 의존한 두 사람의 콜라보가 서로의 안식을 얻게 한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의존할 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이 나오미와 룻, 또 라합과 솔로몬, 그리고 시간 관계상 보지 못했던 에스더의 지혜도 자세히 보면 중요한 공통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상식을 뛰어 넘는다는 것과 희생과 선한 결과입니다. 이런 지혜의 모습은 예수님과 십자가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모형합니다.
고전 1:24b ...그리스도는...하나님의 지혜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지혜라고 불리는 것은 세상의 상식의 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 사람의 옷을 입고 내려오실 수 있나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바퀴벌레 같은 저희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나요? 게다가 사람들보다 영적인 것을 더 잘 보고 예수님의 정체도 알아봤던 마귀와 귀신들조차 자신들이 이런 방법으로 끝장날지 예상조차도 할수 없었던 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십자가 못 박힘과 수치와, 피흘림과, 죽음이라는 우리를 대신하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저희를 구원해 안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결과도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예수님과 십자가를 미련하다고 하는데요,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되신 예수님을 통해야 하는 것이구요, 그 예수님을 따라 자기부인을 하며 이웃의 안식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과 십자가의 방법이 지혜라는 것을 믿어 영적인 눈의 뜨인 사람들은요, 예수님과 같이 상식을 뛰어넘는 자기부인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저 사람이 잘못한거잖아, 너가 지금 화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야. 너가 사장이고 쟤는 점원인데 너가 왜 굽혀? 아니,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데 왜 나만 참아야되는거지? 상식적으로 같이 잘 해야 되는거 아니야?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되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런데요, 이렇게 상식과 합리적인 선에서만 관계를 하면 삶에서 예수님이 드러나질 않고 세상과 구별되지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상식과 합리의 언저리에서 자기 부인도 하고 이웃의 평안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부인을 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아두면요 결국 서로가 서로를 갈가리 찔러 죽이려는 삶을 살게 됩니다. 생각지 못한 남에게 찔리고 찢기는 것보다 내 자아를 꺽는게 옳은 길이라는 믿음으로 자기부인을 하며 모두가 안식을 얻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이 아닐까요? 상식을 뛰어넘는 예수님과 십자가 지혜를 의존할 때 상식을 뛰어넘는 자기부인을 할 담대함과 힘을 얻게 되서 참된 하늘의 안식을 모두가 누릴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해서 홀로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이 땅의 삶 가운데 서로가 함께 안식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