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의 설교가 무려 52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전체를 요약하는 긴 설교가 왜 필요했나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함과 죄악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51절부터 53절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가 지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행태와 같다고 설명하고 마지막에 너희들이 악한 존재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악한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라 일컬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를 일컫는 ‘믿음의 조상’이란 표현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 믿음이 시작되었는데 유대인들은 강퍅하게 반역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나요?
1.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vv2-4
첫 번째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나요?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유대인의 다른 이름인 히브리인이라는 칭호도 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이브리’는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위해 꼭 건넜어야 되는 강이 바로 유프라데스 강입니다. 아브라함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왔기 때문에 히브리인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은 성경에서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구분하는 상징적으로 경계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뜻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건너온 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세상에 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나요? 본문은 그가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구약에 단 한 번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29편 3절입니다.
시 29: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우레를 발하시고 하나님의 소리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강력한 분이심을 보여주고자 이 표현을 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어야 하나요? 아브라함이 처한 세 가지 특별한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우상 숭배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을 보시면
수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이방의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는 당시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유명한 곳이었고 사람들은 그 지역 신인 마르둑과 해, 달, 별 등 일월성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구절에서 유추하여 데라가 우상을 만드는 우상 상인이었다고 유추하는데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분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에게 영과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야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에 살고 있었나요? 창세기 15장 7절을 보시면
창 15:7 …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갈대아는 바벨론입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은 로마를 비유하여 바벨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4천 년 전 갈대아 우르는 이미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문명이 발달한 땅이었습니다. 또한 도시 문명이 발달했고 무역이 발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그런 도시에 살던 아브라함이, 황량한 야만의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어떤 명령을 하셨나요? 3절 말씀을 보시면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스데반은 원래 하나님이 명하신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명령은 창세기 12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안 되나요? 친척들과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면 안 되나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부르심은 바로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시는 모형이기에 아브라함에게만 특별한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고향은 원어로 ‘땅’입니다. 물론 요즘 시대에는 땅이 아닌 회사 등의 일터를 생존의 근거로 삼고 있지만 고대에 특히 아브라함처럼 목축하는 사람들에게 땅은 ‘살아가는 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보이는 것을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의 생존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떠나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살라는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척은 왜 떠나야 하나요? 고대에는 경찰이나 군대가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경찰력이나 법이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하니까 씨족끼리 모여 살면서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런 보호와 안정의 기반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심을 알려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아버지 집을 떠나야 하나요? 아버지는 곧 아브라함의 정체성입니다. 옛날 시골에 가면 개인의 이름으로 알려지기보다 어느 집안의 아들이나 손자로 일컬어졌습니다. 그래서 족보도 관리하고, 유명한 사람의 몇 대 손 임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남들이 알아주는 존재에 근거해 자기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합니다. 우리가 좋은 학교, 큰 회사를 가고자 하는 이유도 남들이 인정하는 곳에 정체성을 두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근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정체성의 근거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 쥔 채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을 통해 우리가 생존하는 근거, 보호받을 근거, 나라는 존재를 자리매김하는 정체성의 근거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이 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났지만 단번에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북쪽의 갈대아 우르에서 남쪽의 가나안에 오기 위해서는 하란을 거치게 되는데 하란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가 되는 도시였습니다.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잘 왔지만 하란을 떠나면 생존의 근거, 보호의 근거, 정체성을 다 버려야 하기에 아브라함은 주저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당장 믿음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믿음은 단번에 생기는 것이 아닌 인생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시점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기까지 순종하는 자리인데, 이것은 가나안에 들어온 후 4-50년 이상 걸린 시점이었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부르셔서 믿음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성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내적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자연스럽게 순종할 수 있으면 더 이상 죄의 영향력에 매어 살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두려움과 욕망은 누가 준 것이 아닙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는 것으로 노력한다고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욕망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심을 우리가 온전히 믿을 때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 강력한 우상이 영향 미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절하고 섬겼지만 지금의 우상은 더 강력하고 교묘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하나님보다 강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많은 풍요로 인생의 기반을 삼으라고 유혹하고 성도 역시 생존의 기반을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이 만났던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스데반처럼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과 예수님도 보는 신기한 기적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를 얘기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자 주신 몇몇 사건들이 일반적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봤으니까 우리 또한 영광의 하나님을 보기 위해 기도하자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나요? 베드로전서 4장 14절입니다.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령을 통해 영광의 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해 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즉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박해와 고난에 처했을 때, 그 위협을 뛰어넘어 믿음을 발휘하라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강력하게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이 영광으로 임하시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나나요? 성경이 임하시면 신비한 체험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으로 경험하려는 태도는 신비주의입니다. 신비주의는 신비한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눈, 귀, 코 등의 감각으로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가 위험한 점은 하나님의 목적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 원래 예민하거나 경험하고자 하는 감각의 왜곡을 가져옵니다. 자기가 영적으로 민감하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매가 있었는데 마귀가 활동하는 곳을 가면 마귀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하는 신비한 냄새가 난다는데, 그냥 원래 코가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영적으로 연관시켜서 마귀 냄새라고 잘못된 믿음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귀가 어떤 존재인지를 냄새나 소리로 알아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귀는 멸망으로 들어갈 존재인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하고 더 성숙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백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지역에서 마귀가 더 활동한다고 두려워하거나 그 장소를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듯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왜곡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어떻게 보여주시나요? 바로 이사야 66편 5절을 보시면
사 66:5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영광을 보여주시는 길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임하자 백성들이 떨고 그 곳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광이 놀랍고 화려하고 아름답고 신비한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찬란하게 드러난 곳은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죄인을 용납하시며, 그 능력으로 반드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영광을 경험하는 길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또한 무엇이라고 부르나요?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시면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신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이 예수님은 또한 말씀이십니다. 구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길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절을 보시면
살후 3:1 …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말씀을 떠나 신비한 능력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길입니다. 신비한 일을 경험한다고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인식만 커지고 더 신비한 일을 경험하고자 욕망만 커져갑니다.
저도 신비한 경험들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이 진짜 내가 경험한 것인지 내가 생각해낸 것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때는 제가 말씀을 너무 모르니, 마치 어린아이의 걸음마를 돕는 손처럼, 부족한 저를 인도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신비한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을 알게 되자 덜 요동하고 덜 불안하고 덜 욕망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가 쉬워졌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하나님을 말씀으로 경험하고 계신가요? 혼란한 세상 속에서,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기반이 되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아가서 영광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나요?
2. 불가능한 상황을 뛰어넘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해야 합니다. vv.5-8
두 번째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나요? 불가능한 상황을 뛰어넘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해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시면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약속은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 두 가지입니다. 창세기 13장 14절과 16절까지 말씀을 보시면
창 13:14-16 [14]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이 약속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에 전쟁이 계속 되는 이유도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렇습니다. 영원히 주신다는 땅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죽여도 괜찮다고 주장합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사망한 군인은 적고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 수만 명이 죽고 있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히 주어진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왔던 이스라엘 대사가 쓴 창세기 책을 읽다 황당한 부분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랍비 교육도 받고 하버드에서 공부한 수재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약속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지금 이스라엘 편에 선 나라들은 다 부강하고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나라들은 멸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그렇고 또 한국이 잘 사는 이유가 이스라엘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이스라엘을 축복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경을 읽을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영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되는데 세상 땅을 침범한 인간들은 죽여도 되고 우리만 번성해야 된다는 잘못된 신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신 것처럼, 우리가 히브리인이 되어 강을 건너 믿음의 여정을 시작해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여정입니다.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신 믿음의 후손이 우리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놀라운 약속의 성취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주 작은 성취만을 맛보았습니다. 창세기 21장 31절부터 32절입니다.
창 21:31-32 [3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땅에 대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땅의 주인인 것처럼 서로 침범하지 말자는 왕들의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에 불과했는데 블레셋을 통치하던 왕이 아브라함을 왕처럼 대우한 것입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약속이 성취되었나요? 8절입니다.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라
백세에 아들을 낳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즉 땅에 대한 약속과 자식에 대한 약속이, 우리가 알듯 영적인 측면에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너무 감동적이라 아브라함이 한 일이 무엇인가요? 창세기 21장 33절을 보시면
창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왜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나요? ‘영원한’은 항상 ‘영원한 언약’이라고도 표현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겠다,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도저히 이루어질 확률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에 불과했고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감탄하며 기념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여기까지 이르렀더니 그제야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나요? 창세기 22장 9절과 10절입니다.
창 22:9-10 [9] …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이 장면만 보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렇게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하며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원래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간 하나님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약속을 이루는 것들을 경험해 가며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여정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 한 명 잘 먹고 잘 살라고 백성으로 부르신 것 아닙니다. 예수 안 믿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세상에 넘칩니다. 생존이 목적이라면 우리는 참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뛰어넘는 약속을 주시며 은혜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게 된 것을 성경이 무엇이라고 얘기하나요? 히브리서 11장 19절을 보시면
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
우리는 이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도 그 고통에서 우리가 일어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이것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고 부르심에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쪽으로 살고 계신가요? 대부분의 개인과 가정은 과도기에 있습니다. 꿈꾸던 아름다운 믿음보다 현실에 찌들어 살며, 온전한 섬김과 아름다움보다 짜증과 비난이 가득한 가정들이 얼마나 많이 있나요?
여러분이 탁월하다고, 돈이 많다고, 학벌이 좋다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 불가능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며, 좌절한 자를 일으키고, 영적 세계의 믿음의 동역자로 서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특히 지금 부모 세대보다 자녀 세대의 믿음이 허약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우상숭배가 더 강력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불가능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종입니다. 우리는 늘 낙심하지만 하나님이 행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